처음 땅콩을 본 것은 전북 부안의 외가에서다. 산등성이를 개간해 만든 초가지붕 높이의 밭은 안방 뒷문을 어둡게 막아섰다. 밭을 매던 할머니의 몸은 땅콩밭과 그야말로 하나가 되어 무색옷이 아니었다면 구분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솔잎을 때려 파도 소리를 내고 노란 땅콩꽃은 할머니 어깨를 따라 시나브로 움직였다. 그렇게 할머니와 땅콩밭이 그려낸 정물화는 지금도 내 뇌리에 남아 있다.
삼월 삼짇날이면 어머니는 검은콩을 볶았다. 주머니 안에서 엄지와 중지로 볶은 콩의 껍질을 벗겨 오도독 씹어 먹는 일은 참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볶은 콩은 긴 겨울을 넘기고 먹을 것 귀하던 시절의 군입거리였던 셈이다. 볶은 콩은 맛있었지만 절구질한 메주콩에는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마솥 주변 항아리 뚜껑에 흰 눈이 쌓여 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메주 삶던 시기는 아마 김장하고 난 뒤쯤이었나보다.
껍질에 구멍 송송 난 듯한 검은콩이나 메주를 쑤는 대두(大豆), 땅콩은 모두 콩과(Leguminosae)에 속하는 식물이다. 약 1만9500종에 이르는 콩과 식물은 난초과, 국화과에 이어 3번째로 큰 속씨식물 집단이다. 농업경제적으로는 볏과, 배추과와 함께 우리의 식단을 이루는 주요 농작물이다. 워낙 수가 많아서 재배 기원을 따지기는 쉽지 않지만 신석기에 밀, 보리와 함께 콩이 인간 집단에 들어온 사실은 화석 증거가 뒷받침한다.
문헌을 보면 강낭콩 같은 일반 콩(common bean)은 중남미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뒤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 같다. 하지만 간장이나 된장, 고추장을 만드는 대두는 중국과 한국이 원산지인 것처럼 보인다. 숙주나물을 키우는 녹두는 인도에서 처음 재배된 것 같다. 이렇게 추측하듯 말하는 까닭은 옛날 일이란 게 늘 그렇듯 확실하지 않고 화석이나 유전자 증거에 따라 언제든 결과가 뒤집힐 수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농업사를 연구한 최덕경 박사는 한반도가 대두를 재배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임을 강조한다. 어쨌든 콩을 재배하고 가공하려면 이들을 담는 그릇과 가공 기술, 그것을 표현하는 용어까지 등장해야 할 것이기에 콩 기원 연구는 기본적으로 융합학문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콩은 도대체 지구상에 언제 등장했을까? 유전학자들은 단일계통인 콩이 5500만년 전에 출현했다고 말한다. 한 종의 식물이 지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콩과 식물의 조상이라는 뜻이다. 검은콩이나 메주콩 말고도 박태기, 아까시나무, 칡 등 꼬투리를 맺는 식물은 무척 많다. 최초의 콩 식물은 공룡이 사라지고 포유류가 굴 밖으로 나올 무렵에 테티스해 연안에서 자라났다. 유라시아와 북미가 한 덩어리, 그리고 남극과 아프리카, 호주 및 남미가 나머지 한 덩어리로 나뉘어 있을 때 그 사이에 있던 바다가 테티스해다. 이 각본에 따르면 야생 콩은 지중해 연안과 아프리카 북부, 멕시코만 연안, 또는 남중국과 인도 등지에서 각기 다른 모습의 식물로 진화해 나갔다가 신석기 시대에 재배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꼬투리 안에 열매를 맺는 여러 식물 가운데서도 콩이 인간에게 선택된 것은 콩에 단백질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콩은 탄수화물이 거의 전부인 밀이나 쌀의 부족한 면을 채워 인류에게 균형 잡힌 영양소를 제공해왔던 셈이다. 두부와 간장은 콩 안에 든 단백질을 효과적으로 추출한 두 가지 대표적인 가공식품이다. 콩나물과 숙주는 아미노산뿐만 아니라 비타민을 공급하는 식품으로 식탁에서 빠지면 자못 서운하다.
어디 그뿐이랴. 콩과 식물은 전 세계 곳곳에서 대기의 80%를 차지하는 무기 질소를 생명체가 쓸 수 있는 형태로 탈바꿈시킨다. 농번기 논두렁에 콩을 심는 뜻이 바로 거기에 있다. 또한 코끝을 쏘는 갓과 무 등 배추과 식물은 황(sulfur)을 그러모으는 재주를 지녔다. 그러므로 작물 사이사이에 콩과 배추를 심으면 자연 토양이 비옥해진다.
하지만 최근 학술지 ‘셀’에 발표된 연구 결과를 보면 콩이 다 좋기만 한 것은 아닌 듯하다. 어떤 종류의 약물을 복용할 때는 콩으로 만든 식품을 삼가야 한다. 장내 세균이 처리한 콩 대사 화합물이 간 해독 효소를 건드리면 특정 항암제 효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속단하지는 말자. 식품 안에 든 3만종이 넘는 천연화합물에 분명 중화제가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 문제는 골고루 먹는 것이다. 올여름엔 미숫가루도 한 모금 마시자.
제주의 원형을 간직한 섬, 비양도
■한국인의 밥상(KBS1 오후 7시40분) = 제주의 깊은 내력을 품은 섬 속의 섬 ‘비양도’로 떠난다. ‘날아온 섬’이라는 뜻을 가진 비양도는 1000여년 전 바다 한가운데서 솟아나 그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한여름 비양도의 제철 음식인 돌문어와 꽃멸치를 맛본다. 농사지을 땅이 부족했던 섬에서 먹고살기 위해 물질을 했던 비양도 해녀들은 고되지만 성실히 살아온 이야기를 전하며 성게파래국을 내준다.
강·숲·정원…저속 노화 돕는 집?
■구해줘! 홈즈(MBC 오후 10시) = 최근 대중들의 관심사인 ‘저속 노화’를 돕는 집을 소개한다. 이날 방송에는 동안 코미디언 팽현숙이 출연해 네 집을 찾아간다. 양평에서는 부부가 함께 정성으로 가꿔낸 정원이 있는 집과 간소하지만 살림살이가 알차게 정돈된 ‘미니멀 하우스’를 방문한다. 가평에서는 집 안 어디서나 강과 숲을 볼 수 있는 배산임수 주택과 3대가 함께 리모델링해 사는 집을 살펴본다.
이달 초 미국 보스턴대 연구진은 국제학술지 ‘JGR 스페이스 피직스’를 통해 태양 폭풍의 영향으로 지난해 5월10일(현지시간) 미국 내 농업용 첨단 트랙터들의 운행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태양 폭풍이란 태양 표면에서 전자와 양성자 등 고에너지 물질이 다량 방출되는 현상이다. 지난해 5월 초 태양 폭풍이 발생한 뒤 이 물질이 지구로 날아들면서 지구 자체 자기장, 즉 지자기장이 교란됐다. 당시 교란 정도를 뜻하는 지자기 폭풍 등급은 ‘G5’였다. G5는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 산하 우주기상예측센터(SWPC)가 발령하는 지자기 폭풍 등급(G1~G5) 가운데 최고치다. G5가 나타난 것은 2003년 이후 처음이었다.
연구진에 따르면 G5 발령 당시, 미국 중부에서는 트랙터 실제 위치와 GPS가 가리키는 위치가 최대 70m까지 차이 났다. 남서부에서는 20m 오차가 생겼다.
이 정도면 트랙터가 울타리를 넘어 아예 다른 농장을 침범하는 수준이다. 이 때문에 당시 농민들은 트랙터 사용을 중단했다. GPS는 평소 수㎝ 단위로 트랙터를 정밀 유도한다.
미국에서 GPS 장착 트랙터는 2010년대 후반 이후 빠르게 보급됐다. 현재 미국 농부 절반 이상이 쓰는데, GPS를 길잡이 삼아 농장 내 정해진 길을 스스로 움직인다. 일일이 농민이 운전석에 올라타지 않아도 알아서 씨를 뿌리고 비료를 주고, 수확을 한다. 노동력을 절감하고 야간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한다. GPS 장착 트랙터는 한국에서도 점차 보급되고 있다.
연구진 분석 결과, 트랙터가 제멋대로 움직인 직접적인 이유는 태양 폭풍으로 전리층이 심하게 교란됐기 때문이다. 전리층은 고도 약 50~1000㎞에 펼쳐진, 전기적 성질을 띤 공기층이다. 태양 폭풍 때문에 생긴 지자기 폭풍이 전리층을 마구 휘저었고, 이 때문에 전리층에서 일종의 ‘공기 파도’가 생겼다. 그 영향으로 지구 궤도의 GPS 발신 위성이 쏜 전파가 지상의 트랙터에 닿지 않고 다른 곳으로 튄 것이다. 전례 없는 트랙터의 위치 오차가 나타난 이유다.
문제는 태양 폭풍은 자연 현상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논문을 통해 “GPS 신호 처리 기술을 더 향상시키고 전리층의 변화 양상을 실시간으로 보정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고 밝혔다.